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용문산 전투 (문단 편집) == 전투 전 상황 == [[중공군 춘계 공세]]의 2단계였던 1951년 5월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던 중공군은 동부전선의 [[대한민국 국군|국군]]을 격멸하기 위해 중부전선에서도 동부전선으로의 증원을 막기 위한 공세를 가했다. 이렇게 중부전선에서 펼쳐진 중공군의 공세를 직면하게 된 부대는 [[장도영]] [[준장]]이 지휘하던 육군 6사단으로, [[6.25 전쟁]] 개전 초기인 [[춘천-홍천 전투]]에서 [[조선인민군 육군]]을 저지해 유명세를 떨쳤으나 딱 한 달 전인 중공군의 4월 공세 때는 화천군 사내면[* 현 [[제15보병사단]] 주둔지.(전 [[제27보병사단]] 주둔지)]에서 벌어진 [[사창리 전투]]에서 [[모랄빵|방어진지를 버리고 무질서하게 도망친]] 부대였다. 중공군의 추격보다도 빨리 도망간 덕에 패전은 물론 빠른 재편성도 가능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영국군]] 제27여단을 주축으로 한 [[호주군]], [[캐나다군]], [[뉴질랜드군]]의 [[영연방]]군이 3일 동안 가평을 고수하고[* 단, 이 당시 영연방 제27여단은 호주군 대대가 40%라는 큰 병력손실을 기록하여 방어하던 고지를 포기하고 퇴각하던 중이었고, 영국군은 규모가 더 작고 전투가 벌어진 667고지에서 멀리 위치해 있었으며, 뉴질랜드군 역시 포병대대라 후방에 위치해 있었다. 결국 고립되어 667고지를 지키던 캐나다군 대대 450여명이 중공군 사단 6,000여명의 공세를 몸빵으로 받아냈고, 밤새 치열한 백병전이 이어져 고지를 빼앗길 위험에 처하자 뉴질랜드군에게 브로큰 에로우까지 요청하여 결국 중공군 격퇴에 성공했다. 캐나다군의 중공군과의 병력비는 1:13이 넘는 큰 열세였으나 캐나다군의 종특인 악으로 깡으로 버티기를 시전한 것도 모자라 중공군을 최소 1,000에서 최대 4,000명을 사상 시켰다.][[https://namu.wiki/w/%EC%BA%90%EB%82%98%EB%8B%A4%EA%B5%B0#s-2|좀 더 자세한 설명은 캐나다군 문서를 참조.]] 이 틈을 타 유엔군이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중부전선 붕괴에까진 이르지 않았으나, 6사단은 얼마나 정신없이 패주했는지 105mm 곡사포를 하나도 안 갖고 내려와서 재편성시 18문을 몽땅 새로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굴욕은 널리널리 퍼져나가 당시 [[미 육군]] [[장병]]들은 6사단 마크를 단 장병을 발견하면 "겁쟁이 블루스타"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6사단은 용문산 일대에 배치돼 사창리에서보다 훨씬 강력한 중공군의 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장도영 사단장은 제2연대 연대장과 정보주임, 작전주임을 모조리 교체하고 예하 3개 대대 역시 대대장을 모두 후송시키거나 군사재판에 회부시킨 뒤, 5월 1일 2연대의 군장검사를 실시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우리 청성부대는 한 번도 패한 일이 없는데 너희가 사창리 전투에서 망쳐 놓았다. 이 오명을 씻기 위해 너희는 앞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이제 후퇴는 없다. 한 발짝도 물러설 생각 말고 전초진지를 사수하라. 진지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한 사단장은 모든 것을 최대한 지원하겠다"며 전투의지를 자극하였다. 이에 연대 장병들은 사창리 전투를 설욕하겠다는 결의로 뭉쳤으며, 특히 2대대는 전방으로 향하며 머리띠나 철모에 決死(결사)를 쓸 정도로 강한 전의를 보였다. [[https://ncms.nculture.org/korean-war/story/4336|파로호전투6·25전쟁의 격전지와 기념시설물 > 6·25전쟁 격전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